역사클릭 홈페이지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한반도의 역사, 문화에 관한 현장학습 프로그램입니다.
‘진행중인 국내 체험기행’ 항목에서 신청하시면 됩니다.
혹 장기 모둠 프로그램의 참여를 원하시면 모둠참여학습 항목을 참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장소: 전라남도 해남. 강진
장르: 역사/ 문화

-다산초당
      이런 점에서 좋아요
   맑은 정기가 우러나오는 산이 품은 다산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다산유물전시관은 다산 정약용선생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작품들을 둘러볼 수 있는 곳으로 다산 정약용에
   대해 좀더 깊고 다양하게 알아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수원화성을 축성 할 때 사용된 거중기나 한강을 건널 때 사용된 배다리 등, 다산 정약용선생은백성들의
   실생활에 꼭 필요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한 기기들을 말이나 글이 아닌 실물로 구체화시킨
   대학자십니다. 농민들이 잘 살 수 있도록 토지제도를 바로잡고, 과학적인 농사기술을 보급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실학의 정신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18년의 유배 동안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후대에 길이 남을 서적을 남기는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유배라는 것은 은둔, 고립으로 인한 단절감을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다산이 이런 마음을 품고 간 길이 바로
   정약용의 유배길이며 이 다산초당은 그의 마음과 사상이 담긴 집대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산초당은 만덕산의 숲 안에 있습니다. 편백나무와 대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 몸속을 채우는 맑은 공기가
   인상적인 곳입니다.

-영랑생가
      전라도 강진이 자랑하는 영랑 김윤식 선생님은 서울로 이사 가기 전 까지 45년을 강진에 살았습니다
   1948년 영랑 김윤식 선생이 서울로 이사한 후 몇 차례 다른 사람들에게 팔려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985년 강진군이 매입을 하였고 1993년에 복원을 시작하여 많은 부분을 영랑 선생의 지인 분들의
   증언을 토대로 지금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영랑(金永郎, 1903~50)선생의 본명은 윤식(允植)이며, 1903년 이곳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강진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휘문의숙에 다니다가 3 • 1운동 때 6개월간 복역하고, 출옥 후 일본 아오야마(菁山)학원
   영문과에 입학했으나 1923년 방학때 잠시 귀국한 사이 관동대지진 소식을 듣고는 학업을 중단하게 됩니다.

      22세인 1925년에 결혼을 하고 1930년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등과 함께 『시문학』지를 창간하여
   『내 마음을 아실 이』같은 향토색이 물씬 풍기는 아름다운 서정시로 이름을 알리게 되어 '북의 소월, 남의
   영랑'이라는 말과 함께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 후 1948년 가족과 함께 서울 신당동으로
   이사한 후 공보처 출판국장도 역임했으나 6 • 25동란 중 은신하다 포탄에 맞아 사망을 하시어 서울 망우리에
   안장되셨습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내 마음 아실 이” “오매 단풍 들겄네” 등의 주옥 같은 작품이 남아 있습니다.

-청자박물관
      전남 강진군 대구면 일대는 9세기까지 고려청자를 제작하였던 지역으로, 우리나라 청자의 변화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는 "청자의보고(寶庫)"입니다.

      이와 같은 중요성으로 1963년 국가사적 제 6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지역에서 조사된 청자가마터는 총
   188기로, 이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청자가마터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수량입니다. 이에 고려청자의
   체계적인 보존과 연구를 위하여 1997년 9월 "강진청자자료박물관"을 개관하였습니다.

      소장유물로는 고려청자 완품 100점과 청자가마터에서 수습한 청자편 3만 여 점이 있습니다. 특히 청자조각은
   1991년에 강진군내에 있는 188기의 청자 도요지에서 모은 것으로 도요지 별로 청자를 굽던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입니다. 이 곳에서 청자를 만들어 당시 고려의 도읍지 개경으로 배편으로 실어
   날랐다고 합니다. 가던 배가 풍랑을 만나 좌초된 것이 지금도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고, 발굴작업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미황사
      우리나라 지도상 섬을 빼 놓고, 가장 남쪽에 자리잡은 절이 미황사입니다.
   미황사는 해남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달마산 품 속에 폭 감싸여 아주 아늑한 절입니다.
   신라 경덕왕 8년(749년)에 의조가 창건한 절이라고 전해집니다.

      미황사 사적기에 따르면 인도에서 가져온 불상과 경전을 소에 싣고 가던 중, 소가 마지막으로 멈춘 곳이 바로
   지금의 미황사였답니다. 이곳에 멈춘 소의 울음소리가 너무도 아름다워 아름다울 ‘미(美)’자와 누를 ‘황(黃)’자를
   써서 미황사라 이름 지었습니다. 미황사 뒤편에 병풍처럼 둘러선 달마산은 그 빼어난 아름다움 때문에 남도의
   금강산이라고도 불립니다.

      달마대사가 중국에 선을 전하고 해동의 달마산에 늘 머물러 있다고 하여 달마산이라 이름 지어졌습니다.
   고려시대의 기록에 따르면 중국 송나라의 높은 관리들이 찾아와 달마산을 찬탄하고 예경하였다고 전해집니다.

-녹우당
      전남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위치한 녹우당은 윤선도가 기거하던 녹우당과 안사당, 추원당 그리고 고산 사당과
   어초은 사당 등 해남 윤씨 종택 전체를 말합니다.

   고산 윤선도의 고택으로 호남지방에서 가장 연대가 오래됐으며 민가 가운데 규모가 상당히 큽니다.
   종택의 사랑채는 윤선도 선생이 수원에 살 때 유년 시절인 봉림대군 시절 스승이었던 고산에게 효종이 하사한
   집이었습니다. 1668(현종9)년에 집의 일부를 헐어서 뱃길로 이곳까지 옮겨와 지었습니다.

      뒷산의 비자나무 잎이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소리가 빗소리처럼 들린다 하여 녹우당이라 이름 지었답니다.
   윤선도와 윤두서 등 해남 윤씨 가문 인물을 배출한 곳으로 국보 240호'인 공재 윤두서 자화상과 보물 3점 등
   2천여 점의 문화재가 전시돼 있습니다.

-대흥사
      두륜산의 울창한 숲을 을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는 대흥사는 풍경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해남 대흥사는 창건된 시기에 대하여 여러 설이 있지만 대흥사 에서는 신라 진흥왕 때 아도화상이 창건한
   기록을 따르고 있습니다. 임진왜란의 승병장 이었던 서산대사 이후로 사찰 규모가 확장 되었으며 두륜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금당천을 경계로 남원과 북원으로 나눈 구역이 있고 표충사 구역과 대광명전
   구역으로도 나뉘어 있는 것 또한 대흥사의 대가람으로서의 면모를 짐작하게 합니다.

      초의선사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은데 '초의선사( 의순, 1786-1866)'는 조선 후기의 대선사로서 우리나라
   다도를 정립한 분입니다. 그래서 '다성(茶聖)'이라 부릅니다. 다산 정약용, 소치 허련, 그리고 평생의 친구
   되는 추사 김정희등과 폭넓은 교유를 가졌는데, 초의는 <동다송(東茶頌)>을 지으며 우리 차를 예찬
   하였습니다.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대흥사의 동쪽 계곡으로 들어가 '일지암'을 짓고 40여 년 동안
   진리를 찾아 정진하였으며, 다선삼매(茶禪三昧)에 들기도 하였습니다.

      천불전의 많은 부처님이 하나도 같지 않고 각기 다른 모습이라는데 신비합니다.

      또한 일화가 전해지는데 경주에서 만들어진 천불을 두 척의 배에 나눠 싣고, 부산 앞바다를 지나 해남
   대흥사(대둔사)로 향하는 도중 한 척의 배가 울산진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일본 대도포에 표착하였는데,
   일본인들이 이 배를 발견하고 서둘러 절을 짓고 불상을 봉안하려 했으나, 이 불상들이 일본 대도포현감 꿈에
   나타나, 우리는 조선국 해남 대둔사로 가는 중이니 일본에 봉안할 수 없다고, 여러 번 현몽하여 대둔사로
   돌려보내게 되었다고 전해진답니다. 일본인들이 이 옥불을 돌려보내기 아쉬워, 불상 밑에 '日'자를 새겨 보냈다고
   "일본표해록"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답니다. 대흥사에는 경내에 걸려있는 현판 글씨는, 조선 시대의 명필들이
   직접 쓴 것으로 조선 시대 서예의 참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특히 대웅보전의 현판 글씨는 추사 김정희와 원교
   이광사의 일화로 유명합니다.

      제주도로 귀양가던 추사 김정희가 대흥사에 들러, 원교 이광사가 쓴 글씨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내리게
   하였는데 제주도 귀양에서 돌아오며 다시 걸게 하고 자신이 쓴 ‘무량수전’ 현판은 내리게 하였답니다.
   이는 곧 제주도 귀양에서 겸손의 미덕을 쌓은 것이라 여겨진다고 합니다.